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호남 지역갈등 (문단 편집) ==== 개요 ==== [[전라도|호남]]과 [[경상도|영남]]의 대립이 호남쪽의 경제적 차별로 인해 일어났다고 여기는 견해이다. 이에 대해선 1960-70년대 당시 한국의 주된 수출 라인은 일본-미국으로 이어지는 태평양 라인이라는 점, 이로 인해 일본과 가깝고, 미국으로 나가기 쉽고, 들어오기도 편한 남동임해지역에 중화학공업이 집중된 것이 현실적인 선택이었다는 점이란 반론도 있다. 전통적으로 [[전라도]] 지역은 곡창지대로서 농업이 발전하였고, 특히 [[쌀]]을 집중 생산하는 한반도의 밥줄이었기 때문에 인구가 많은 지역이었다. [[벼]] 농사 외에도 서해 남단과 남해를 낀 해안에서 어업이 발전하여 해산물도 풍부했다. 이 때문에 [[후삼국시대]]에 [[후백제]]가 국토가 훨씬 넓은 [[고려]]를 상대로 군사/경제적으로 우세를 점하며 싸울 수 있었으며[* [[후백제]]의 영토는 [[전라도]]와 [[충청도]] 남부 일부인 반면 [[고려]]의 영토는 한반도 중부 전체였다.] [[임진왜란]] 당시 전 국토가 왜군에게 유린당하면서도 방어하면서 역전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이순신]], [[권율]], [[김시민]] 등 명장들의 [[한산도 대첩|활]][[진주 대첩|약]]으로 최대 곡창지대 전라도를 지켜내면서 보급이 이어졌기 때문. 그래서 궁핍했던 [[일제강점기]] 시기에 다른 지역 주민들은 만주로 많이 떠났지만[* 현재 조선족들의 출신지를 보면 함경도 출신들이 가장 많고(주로 연변) 그 다음은 평안도 출신들(주로 요녕성), 그리고 그 다음으로 의외로 경상도 출신들이 꽤 많다고 한다.], 호남의 경우 인구유출이 별로 없었다는 말도 있다. 호남은 곡창지대였던 연유도 있지만, 당시 호남의 대지주이자 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현준호]]가 전남 영암에서 900정보(270만 평) 규모로[* 오늘날 읍이나 면이 대개 80만 평 ~ 250만 평 정도 되는 크기다. 즉 큰 읍면 한 곳 넓이의 물을 메워 전부 논밭으로 바꾼 것.] 간척사업을 하여 세운 학파농장에서 5,000명이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을 만큼, '''굳이 만주로 가지 않아도 살 수 있는 방안(대안)'''을 마련해준 공로도 무시할 수 없었다. 간척 사업기간 및 그 이후에도 만주로의 인구유출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학파농장이 해준 것.[* 그는 일제강점기 시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직을 지낸 친일파다.[[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20420175404503|#]] 한편, 그를 긍정하는 측에서는 '이 학파농장의 일과 민족자본([[조흥은행|호남은행]])을 설립한 공적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으며, [[6.25 전쟁]] 당시 잡혀 죽기 직전까지도 그를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해방 직후 노무자 대표들의 노임지급 요구에도 성실히 응해 품삯을 두둑히 챙겨주었던 것도 인심을 얻었던 이유'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 때부터 더 많은 새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공업단지 개발이 경부고속도로 라인을 타고 영남 지역에 집중되고, 호남 지역은 쌀농사에 묶이면서 경제개발에서 밀리기 시작하고 이때부터 영호남간 경제적 격차가 벌어지고 일자리를 찾아 인구이동이 발생하며 가속화된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